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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화성 8차 사건'에 숨은 의문점 6가지

by 삭제중 2019. 10. 8.

지난 1988년 9월16일, 경기 화성 태안읍 진안리에 살던 박아무개양(14)이 집에 침입한 괴한에게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됐다. 일명 ‘화성 8차 사건’이다.

 

경찰은 경운기센터 수리공이던 윤아무개씨(22)를 범인으로 검거했다. 윤씨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으나 20년으로 감형돼 2009년 가석방됐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화성 연쇄살인의 ‘모방 범죄’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이춘재가 “8차 사건도 내가 했다”고 자백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여기에 윤씨는 고문과 가혹행위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며 줄곧 무죄를 주장해 오고 있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이 사건과 관련한 의문점을 6가지로 정리했다.

 

 

1. 소아마비 앓던 윤씨가 높은 담장을 넘을 수 있었을까?
윤씨는 3살 때 왼쪽 발에 소아마비를 앓은 후 다리를 절었다. 당시 방송화면을 보면 윤씨가 심하게 다리를 저는 장면이 나온다. 중앙일보에 나온 범행 현장(박양의 집)에는 콘크리트 담장이 쳐져 있다. 족히 150cm는 돼 보인다. 다리가 불편한 윤씨가 밤에 담장을 넘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2. 윤씨에게는 너무도 무모하고 위험한 범행이다.
모든 범행은 완전범죄를 꿈꾼다.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의 범행은 그만큼 발각될 확률도 높다. 때문에 범인들은 범행을 계획할 때 ‘도주로’가 쉽게 확보되는 곳을 선택한다.
다리가 불편한 윤씨의 경우 박양의 집은 침입도 어렵고 도주도 어렵다. 당시 박양의 집에는 부모가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때문에 박양이 “악”하는 소리를 내거나 몸싸움이라도 했다면 금새 부모가 알아차렸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윤씨는 도주는커녕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윤씨의 범행으로 보기에는 성공 확률보다 발각될 확률이 많았기에 너무 무모하고 위험한 범행이다.

 



 

3. 윤씨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약 10개월만인 1989년 7월25일 오후 윤씨를 그가 일하는 농기구센터에서 검거해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로 연행했다. 윤씨는 처음에는 “나는 범인이 아니다”라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사건 당일 알리바이에 대해 “집에서 잠자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루 뒤 경찰은 윤씨가 범행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국과수의 감정결과 등을 들이대며 7시간동안 추궁하자 26일 새벽 3시쯤 범행일체를 자백했다는 것이다.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윤씨는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이유로 항소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윤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원심과 같은 판단을 했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서 윤씨는 무기수가 된다. 그는 교도소 안과 언론과의 옥중 인터뷰에서 “나는 범인이 아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일관되고 호소했다.

 

4. 고문과 가혹행위 없었나?
윤씨는 처음에는 범행을 완강하게 부인했었다. 그러나 경찰의 밤샘 조사 후 자백했다. 이에 대해 윤씨는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청주교도소에서 윤씨를 담당했던 한 교도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윤씨가) 고문을 당해서 허위 자백을 한 거다. 잠을 재우지 않고 엄청나게 많이 맞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자백을 안 하면 죽을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경찰서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일상화될 정도였고, 실제 화성 연쇄살인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횡행했고, 범인으로 몰렸다가 목숨을 끊은 사람도 여러 명이다.

 

 

5. 동위원소 감정법 얼마나 정확한가?
경찰이 윤씨를 8차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본 이유는 ‘혈액형’과 ‘체모’였다. 박양 살해 현장에선 남자 음모 8개가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는 이 음모를 방사성 동위원소 감별법에 의한 정밀감식을 했고 혈액형이 B형이고 일반인에게는 PPM 단위로 측정이 불가능한 중금속인 티타늄(13.7 PPM)이 다량 검출됐다는 결과를 경찰에 통보했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B형 남성 460명의 음모를 취합해 감정을 의뢰했고 윤씨의 음모가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것과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 체모 방사성동위원소 감정 결과가 국내 사법사상 처음으로 재판 증거로 채택된 사건이다. 그러나 ‘과학적 수사기법’이라 했던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은 이제는 쓰이지 않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기법이다.
복수의 전문가들도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의 정확도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범인을 좁혀가는 데는 유용한 방법이지만, 특정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6. 증거물 왜 폐기했나?
현재 8차 사건과 관련한 증거물은 남아 있지 않다. 경찰은 당시 범인으로 검거한 윤씨와 관련 증거를 모두 검찰에 송치했는데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일반 사건 서류의 보존 기간은 최장 20년이다.
이 사건 확정판결이 난 날은 1990년 5월8일로 20년 뒤인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이 사건 증거물은 순차적으로 모두 폐기됐다. 당시 증거물을 현재의 과학수사 기법으로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윤씨가 범인인지, 아니면 이춘재가 범인인지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은 어렵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조사에 나설지도 의문이다.
윤씨는 가족들과 재심을 준비하고 있으며 변호사도 선임할 예정이다. 하지만 물증을 통한 검증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얼마만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지는 알 수가 없다.